Unsaid


에릭 켈러 & 김선근

Eric Keller & GJ Kimsunken


2025 / 05 / 29 - 2025 / 06  / 28 

Unsaid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때때로 우리는 봄으로써 진정으로 보지 못한다. 본다는 것은 여러 작용을 함유하는데, 주체가 대상을 자기에게로만 굴절시키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가 대상을 보는 행위를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의 상호 관계’가 형성되는 일로 인식해볼 필요가 있겠다. 꿰뚫어 본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 존재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불어 심미적 가치를 탐구하여 표피적 차원 너머에 숨겨진 대상의 내밀한 본성을 화면에 옮기는 것이 예술가의 과제임을 고려할 때, 어쩌면 미술은 대상의 비현상적인 이면과 가장 적극적으로 시선을 교차할 수 있는 장 (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봄과 보임이 동시에 마주하는 이 상호적 현상에서 주목할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파장이자 침묵이 일순간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롤랑 바르트적인 설명을 들여와 보건대) 이렇듯 말을 하지 않는 (unsaid) 침묵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직관과 분위기, 혹은 느낌에 의해서만 감지되는, 풍부하면서도 규정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선다. 다시 말해 침묵은 의미와 깊은 감정의 가능성을 유발하는 조건으로, 이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특별한 교감으로부터 다층적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든다. 


본 전시 《Unsaid》에 참여하는 작가 김선근과 에릭 켈러는 이렇게 시각을 통한 신체의 지각을 매개로 세상과 상호 관계를 맺고, 이 과정에서 무언가를 짐짓 말하지 않음으로 하여 비현상적 차원의 열린 감정과 의미의 창구를 연다. 가령 이들은 화면 내에서 형상을 명시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초월하여 캔버스 밖의 존재에 이르거나, 시각적 기억을 환기하면서도 그것을 잔향처럼 남겨 궁극에는 경험과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두 작가의 작업은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기지수와 그림으로 경험해야 알 수 있는 변수 사이에서 사유의 굴절 혹은 감각의 경신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전시는 이처럼 나와 대상이 상호적 시선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는 이의 시야를 옮기고, 양자의 시선이 마주할 때 일어나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파장으로부터 잠재적인 의미가 순환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자 한다. 


# 김선근


김선근 작가의 작업에 드러나는 정적인 빈 화면은 ‘그림 밖’을 보기 위한 장치다. 작가는 많은 곡면을 품고 있는 빈 평면과 시선을 마주함으로써, 형상의 외형이 아닌 비가시적인 존재 자체를 둘러싼 고민이나, 화면 안의 형상과 화면 밖의 공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 다양한 사색을 시도하는 까닭이다. 말인즉 김선근은 형상을 통해 형상을 극복하기를 궁구하는데, 그에 의하면 이는 자유와 해방, 완성의 감각을 생명으로 하는 ‘초형상성’의 개념으로 번역될 수 있다. 특히 그는 ‘보편적인 사람의 형상’을 화면 밖에 위치시켜 형상이 형상을 초월하게 되는 것에 작업의 의미를 둔다. 김선근은 구상 작업을 추상의 언어로 유효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궁리하기 시작하면서 형상의 외형이 아닌 자체로서의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작가는 부재를 포함하는 것으로 새로운 범주의 현존을 묘파하려는 동양의 ‘여백’과 ‘有와 無’ 개념을 접하게 되면서 캔버스 밖으로 형상을 자유롭게 조형화할 수 있는 작업의 단서를 포착했다. 그와 같은 고민 끝에 김선근은 캔버스 안의 화면을 비우고 형상에 대해 부러 언급하지 않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숙고된 공백감에서 비롯되는 김선근의 ‘화면의 침묵’은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밖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사색하게 만든다.


김선근의 작업에서 발화되지 않는 고요가 켜켜이 쌓이는 요인으로 우리는 우선 작업의 과정과 재료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머리, 얼굴, 손 등 신체를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의 형태를 토대로 간단한 드로잉을 만든 다음, 이 이미지를 나무 패널에 그리고 잘라 틀을 만든다. 뒤이어 작가는 패널을 캔버스로 감싼 후에 젯소를 칠하는데, 여기서 (회화 작업의 준비 작업인) 단순 젯소칠 외의 다른 표현이 모두 배제되는 이유는 상기했다시피 김선근의 작업 대상이 화면 안이 아닌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인팅의 이전 단계임을 자명하게 노출하는 소박한 젯소칠로 오브제의 부재를 다루어, 대상이 없고 대상이 아닌 화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무를 통해 현상적 유를 인식하는 동양 철학적인 사유는 작가의 이러한 형식적 시도를 근저에서부터 뒷받침하여, 작품이 화면의 표면적 공간을 극복해낼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한다. (이를테면 노자가 무의 효용에 의해 유가 유용하게 됨을 논했듯이) 김선근은 빈 화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안과 밖의 의미를 허물고, 부재를 통한 현존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감으로써 부재 자체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미지를 화폭 너머의 외적 공간으로 무한히 연장시키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공간과 인과의 탈피가 유발되면서 관객의 의식 또한 이성적인 구획을 벗어나 외부와의 우연한 조응을 통해 형성되는 가능성의 장으로 나아가는 까닭이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의식과 그림 바깥의 형상은 상술했던 젯소의 백색으로 인해 흰 벽으로 폭넓게 확장하면서, 완성된 형태를 발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무한을 내포할 수 있음을 감지하게 만든다. ‘있다’를 통해 세계를 배열하지 않는 김선근의 이러한 작업은 형상이 비워진 공허를 직면케 하며, 침묵하듯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화면이 관객의 의식과 함께 정형의 원리로부터 멀어진 바깥의 어딘가로 나아가기를 추동하고 있다.


# 에릭 켈러


예술을 통한 경험에 대해 몇 가지의 생각을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다. 내면을 새로이 점령하는 잠재의식과 주소 없는 에너지를 일깨우는 것, 어떠한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징후들을 조감하는 것. 작가 에릭 켈러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이렇게 알 수 없는 해방감과 감정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작가는 기억의 저편에 묻힌 장소와 상황으로 시간을 건너, 그러한 인상을 지금, 여기의 그림으로 불러들인다. 이처럼 켈러는 시각적 기억을 회화적 허구로 전환하면서도 특정 장소와 대상을 초월한 분위기로 화면을 채우려는 여로를 일관되게 이어나가는 중이다. 작센주 출신인 작가는 특히 공산주의 동독의 잔재로 남은 장소들과 세월의 얼룩이 명멸하는 폐허를 한때 자주 다루었고, 이 외에도 벤치와 공원, 정류장, 산책로 등 무의식에 저장된 일상의 장면들이 그의 그림에서 시간과 기억에 관한 모종의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요컨대 켈러에게는 그가 본 모든 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는 셈인데, 기억의 창고를 더듬는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그가 자신을 스친 상황과 감정을 그대로 소환하거나 명료하게 발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림을 통해 작가는 기억의 어느 먼 맥락에 속한 인물과 사물, 장소와의 사이에서 봄과 보임을 동시에 마주하며, 그 결과를 서사와 정보가 모호한 (얼핏 초현실적인) 화면으로 재구성하여 실제와의 접속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정을 침묵하는 그의 그림에서 관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각의 덩어리들을 되레 천천히 호흡하고 체험하게 된다. 켈러의 작업이 이러한 비언어적인 아우라를 발하는 데에는 사진이나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 작업 방식이 무엇보다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작가는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축적한 무의식의 지대를 횡단하면서, 흐릿한 형체에 지나지 않은 불명확한 느낌과 아이디어로 작업을 시작하는 까닭이다. 그만큼 그림을 시작할 때에는 혼잡한 생각들이 화면을 오가게 되지만, 켈러는 레이어를 쌓기 시작하면서 그림에 있어야 할 색과 빛, 음영을 찾아 나간다. 예컨대 출품작 전반에 가라앉은, 안개처럼 퇴색된 색채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상적인 분위기와 그림의 표면 아래 정교한 깊이를 마련하는 주된 요인이다. 그의 색조는 단색처럼 보일 만큼 절제되어 있으나 기실은 다채로운 톤을 오가면서도 잔잔한 떨림을 유지하는데, 작가는 각각의 색상 층이 분리되지 않도록 물감을 얇게 덧칠하여 모든 색이 그림 전체에 작은 비율로 스며들게 만든다. 그러면 불투명한 오일의 안료가 서로 겹쳐지면서 공간감의 미세한 차이, 공중에 흩어지는 공기와 먼지의 나른한 유희가 그림에 펼쳐지고, 더 나아가 직접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회고하고 관망하는 간접적인 분위기가 화면을 물들이게 된다.


에릭 켈러의 그림은 이렇듯 모호함에서 비롯되어 종내 모호함으로 재차 도달하면서, 내밀한 기억과 감정의 세계에 접근하면서도 그것을 웅변하기보다는 잔향만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관객은 작가의 자취를 좇아 레이어를 쌓다가 침묵처럼 불현듯 멈추고 이미지에 의한 파생적 경험을 하게 된다. 아득한 미지처럼 그려진 장소와 이 공간에 인물이 대개 생략된 것, 간혹 두어 명의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이 풍경 안에서 막연히 길을 잃은 듯 보이는 점은 일종의 ‘흔적’을 암시함으로써 비가시적인 것을 향한 관객의 감각 작용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과연 우리는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사물과 공간을 상상하며, 내용적이고 미적인 측면에서 작품이 지닌 깊은 층위를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환기의 대상을 베일에 싸인 불명확함으로 역류시키는 켈러의 작업은 재현적 한계를 벗어나 다의적인 의미를 생성하고 보이지 않는 내밀한 세계에 접근하려는 회화적 시도로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시각 세계의 외피는 언뜻 오랜 세월에 건조되어 흩어질 듯 보이지만, 켈러는 모호함과 여백을 노정하는 그의 기억의 화면을 통해 새로운 감정과 의미의 지형을 예고하며 나직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