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i : 작가의 방


서상익 & 이동재

Seo Sangik & Lee Dongjae


2025 / 12 / 26 - 2026 / 01  / 31

 

Loci : 작가의 방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누군가의 낯선 방에서도 우리는 손에 닿는 사물의 온도나 손길의 흔적, 방 안의 공기가 흐르는 결을 통해 그 사람의 세계를 곧잘 느끼곤 한다. 존재는 언제나 하나의 공간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구에 던져진) 인간은 과연 스스로를 정착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실존은 공간적이다. 이처럼 ‘거주함으로써 사유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은 일찍이 하이데거의 논저에서도 내비쳐진 바 있다. 그는 현존재 (다자인, Dasein)를 다름 아닌 거주의 의미로 다루었던 것이다. 다자인은 문자 그대로 ‘그곳에 있다’는 뜻으로, 존재가 언제나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Loci : 작가의 방》은 이와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서상익과 이동재의 공간, 곧 ‘작가의 방’을 이들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위치시키고 의미를 형성하기 시작한 존재론적인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하이데거의 거주 개념을 전시적 은유로 재구성한 작가의 방에서, 두 작가의 감각은 특정한 방향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작가가 세계와 선택적으로 관계 맺은 ‘취향’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취향은 다자인으로서의 작가가 ‘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립된 감각적 표현이다. 이러한 맥락은 두 작가의 방을 ‘Lcci’로 지칭하고 있는 전시 제목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라틴어 Locus (자리, 장소)의 복수형인 Loci는 의미와 감각이 싹트는 ‘자리들’을 가리키는 동시에, 각 작가가 세계와 관계 맺으며 자신만의 감각과 취향을 쌓아 온 서로 다른 출발점을 환기한다. 그렇게 선택된 것들이 감각을 형성하고, 감각이 다시 세계를 구조화하며 의미의 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이상의 논지를 압축할 때, 작가의 방에서는 그와 같은 감각의 구조화가 작품이라는 하나의 형식으로 응집된다고 하겠다. 작품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창작자가 무엇을 감각하고 선택해 어떻게 응축했는지를 담지하는 감각의 결정체로서, 익숙함에 가려진 세계의 한 갈피를 여는 사건인 까닭이다.


한편 관객은 감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작가의 방에서 두 작가가 각자의 취향과 선택을 어떻게 세우고 마주하는지를 조심스레 탐색하고, 그러한 구조화가 작품을 통해 어떠한 모습으로 소환되었는지를 살핀다. 또한 전시는 관람자를 세계 안에서 상호관계적인 또 다른 다자인으로 상정하여, 작품이 열어놓은 사건에 들어선 관객이 자신의 세계와 해석을 함께 엮어가도록, 보는 이를 참여의 편에 서게 한다. 전시는 이렇듯 작가의 감각과 취향이 갖추어지는 과정을 관객이 경험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것이 내면화된 작품이 작가의 방이라는 특정 공간을 매개로 관객과 폭넓게 접촉하고 교감하기를 기대한다.


# 서상익

 

작가 서상익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록 (Rock) 음악을 둘러싼 그의 오랜 취향의 체현물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10대 시절부터 그의 작업 환경은 늘 음악에 둘러싸여 있었고, 특히 록은 그의 그림의 정서를 가늠하는 이정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디오와 LP로 채워진 서상익의 방은 그래서 록이 그의 작업에 어떠한 감각의 기저로 내면화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유효하다.


서상익은 2023년을 기점으로 내러티브 중심에서 벗어나 회화 자체의 쾌, 특히 형식 면에서 물감과 행위의 즉각적인 반응을 탐구하고 있는데, 이는 록이 유발하는 즉흥성과 신체성, 생동감의 정서와 호흡을 같이 한다. 개인적 서사에서 비롯된 초기작이나 미술관을 배경으로 현대 미술과 관객의 관계를 조명한 ‘익숙한 풍경’, 예술의 종교성을 고찰한 ‘화가의 성전’ 연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작 (前作)들에서는 기실 물감과 붓질이 최대한 감춰진 채 이미지의 지시성이 부각되곤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제 손의 움직임과 재료를 화면에 순연히 드러내며 이미지의 자체적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관성에 기대지 않는 색을 추구하거나, 첨가제 없는 물감을 두껍고 억센 붓으로 퍽 역동적이게 긁는 기법도 붓질과 재료, 행위와 시간을 (에너지를 발산하는 록의 직진성처럼) 캔버스에 우회 없이 기록하게 만든다. 나아가 서상익의 작업이 내장하는 태도적인 맥락 또한 록의 구조와 미학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그는 집중의 극점에서 도달하는 무아의 희열을 작업의 중요한 조건으로 언급하는데, 긴장과 폭발, 침잠과 해소가 교차하는 구조는 바로 록이 조성하는 미학적 경험과 유사한 까닭이다. 록 공연에서는 파열 직전까지 고조된 감각이 관객을 트랜스 (trance) 상태로 이끌고, 그러한 공명이 지속될수록 에너지가 내면으로 가라앉아 현장이 개인을 넘어선 황홀로 채워지지 않던가.


그런데 서상익의 회화는 물질과 이미지에서 발생하는 즉시적인 감각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화면 위에서 이것을 다시 이성적으로 관찰하려는 거리두기를 전제로 한다. 이는 본 전시에서 작가가 패션 광고나 앨범 커버처럼 관념성이 강한 이미지를 선택하고 배치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포착된다. 작가는 작업 대상을 고를 때 언제나 조형적 가능성과 시각적 만족감을 기준으로 삼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번에 시선을 끌어당기면서도, 그것이 회화로 재생산될 때에 관념이 어떻게 강화되거나 전환되는지를 면밀히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서상익의 회화와 (그가 오랫동안 체화해 온) 록의 작동 방식은 바로 이 같은 긴장과 조율의 지점에서 호응하고 있다. 얼핏 격렬한 에너지의 분출처럼 보이는 록 역시, 실은 감정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음향 요소들을 치밀하게 배열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형식으로 성립하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서상익의 회화는 즉각적 반응의 흔적과 이성적 구조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감각되고 다시 사유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장이라 하겠다. 되풀이하거니와 이러한 실험은 ‘회화 그 자체’가 하나의 자율적 세계로 확립될 수 있는지를 묻는 시도이며, 전에 없던 새로운 감각을 펼치되 그 세계가 스스로 완결성을 갖추도록 구축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근원에는 그의 취향과 루틴이 축적된 ‘작가의 방’이 놓여 있다. 폭발과 침잠, 계산된 조직과 즉흥적 떨림이 공존하는 록의 감각은 이렇듯 그의 자아의 지표가 되는 방을 채움으로써, 서상익의 회화가 향하는 세계의 윤곽을 마련하고 있다.


# 이동재


이동재 작가의 방을 옮겨낸 전시 공간의 양상을 보건대, 그의 작품이 출현한 문맥은 전통 문방 (文房) 문화를 구성한 기물과 다기류, 차를 즐기는 깊은 취향과 기호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의 공간에서는 오랜 시간 손에 닿아 빛과 습도에 노출되며 마모된 기물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이동재의 시선이 유기적인 변화의 리듬과 이를 관조하는 태도에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증언하는 작가의 감각과 취향은 본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작업들의 물질성과 행위성에서 가시화된다. 


이동재는 2025년 초부터 한지의 원료인 닥 죽과 찻물, (오배자, 홍화, 소목 등) 천연염료를 활용해 작업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생물 유래의 터전을 공유하는 재료다. 이동재는 이렇게 시간의 흔적을 품은 자연의 미감을 고스란히 들여와 그것이 (마치 찻물의 농도를 더해가듯) 작업으로 발현되기를 관찰하는 바, 그와 같은 수행적인 과정은 뜨기, 두드리기, 말리기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그는 한지의 재료인 닥 섬유를 물에 풀어 떠낸 후, 물기를 짜내며 두드리고 펴내 지판 형태의 밑 작업을 만든다. 이 지판을 반복적으로 누르고 두들기면 주름진 피부 같은 촉각적인 표면이 만들어지는데, 작가는 여기에 잘게 부수어 끓인 오배자 용액을 수차례 덧입혀 섬유의 물성과 염료의 발색이 응축된 견고한 표면을 얻는 것이다. 이렇듯 지판 형태로 제작된 평면 작업 외에도, 이동재는 닥 섬유로 감싼 오브제 등을 통해 물성이 배어나는 질감과 그에 상응하는 미감을 여러 조형으로 전개한다.


상기의 내용은 작가의 취향이 조형 원리와 정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동재 작업의 고유성은 이것이 미학적인 맥락으로까지, 일면 순리에 가깝게 직간접적으로 연장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작업 세계가 일관되게 견지해 온 ‘유기성’에 주목하게 된다. 초기작부터 최근의 활동을 포함한 이동재의 작업에서는 재료와 과정, 표면과 의미가 상호 의존하고 변화하는 유기적인 관계가 줄곧 유지되고 있다. 가령 그는 녹두, 팥 등의 곡물로 (녹두 장군과 같은) 역사적 아이콘을 재현하거나, 크리스탈을 조형 언어로 사용해 스타가 지닌 광휘를 표현함으로써 물성과 도상, 주제 사이의 유기성을 궁구해왔다. 본 전시에서 그가 세월을 머금은 기물과 한지, 차를 매개로 생명성과 시간성에 대한 애호를 환기하고, 이를 재료와 행위, 형상과 의미로 확장하는 것도 유기적 구조를 지속적으로 모색하는 흐름에 놓여 있다.


그러나 닥 죽과 오배자, 한지 등을 이용한 이동재의 근작들은 한층 근원에 가까운 존재 형태와 유기적인 표면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아이콘 중심의 기존 작업을 초월하여) 보다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생명적 기원을 갖는 물성을 느리지만 반복적인 손의 수행으로 다룸으로써, 재료가 살갗이나 껍질 같은 생명의 근본적인 외피를 스스로 생산하고 서사를 쌓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재의 이번 작업들은 생명적인 생성 과정이 표면에서 벌어지는 현장이라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 전시가 주목하는 그의 방은 바로 그러한 물질과의 전일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자리로서, 취향, 재료와 행위, 동적인 생명의 상이 하나의 연대로 엮이는 과정을 관객의 눈앞에 실제적인 양상으로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