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비가 내린다
신혜림
Shin Healim
2023 / 12 / 14 ~ 2024 / 01 / 13
삶으로 빚은 노정
조은영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모든 인간이 짊어지고 나가야 할 개개의 굴곡 너머에는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인류 공통의 보편성이 존재한다. 존재를 일깨우는 이 보편성을 시각화하는 것은 기실 많은 예술가들이 고투해온 대목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공예는 이미 자체로서 만인에 공통한 가치이자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행위라 하여도 무리가 없다. 생리적 필요에 따라 공예품을 제작하는 것은 전 지구적인 공통의 현상이었고, 공예는 살고자 힘쓰는 인간을 도와 우리와 함께 역사의 궤적을 만드는 까닭이다.[1]
이처럼 공예는 풍부한 잠재성으로 우리 삶에 배어들며 고유의 의미 영역과 조형성을 무한히 팽창시켜 나간다. 그리고 공예의 이러한 스펙트럼을 고려할 때, 작가 신혜림의 공예 작업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형성되는 복합적인 관계와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삶의 물결 위로 싣는 바람직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는 재료와 물성, 기능과 기술 그리고 반복적인 손의 노동과 장인정신에 몰두하여 새로운 획득물을 유기적으로 습득하고, 그처럼 생성된 작업으로 작가와 관객, 사물 사이에 사색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는 어느덧 열한 번째 개인전이 된 이번 《시간의 비가 내린다》에서 공예의 근본적인 요건들을 층별로 구획된 전시 공간에 하나씩 풀어내며, 그의 작업이 지닌 고유의 언어와 온도로 공예의 맥락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전시는 신혜림의 작업이 공예의 전통 안에서 어떠한 정신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의 공예가 더딘 가운데서도 삶과 정신의 거울로서 어떻게 의의를 찾아가는지 조명하고자 한다.
# 벽을 위한 사물
‘시간의 비가 내린다’는 주제는 신헤림의 작업 세계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개념적 근원으로, 시간성은 그의 작업을 가능케 하는 모태와도 같은 감각이다. 그리고 신혜림의 공예에서 시간의 자명한 질서와 흐름이 일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축적한 ‘반복’이라 하겠다. 특히 지하 전시장에 설치된 정방형의 평면 작업들은 되풀이되는 손의 노동이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닌, 손과 손기술, 재료가 통합된 장인정신으로 승화되는 현상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가 ‘벽을 위한 사물’로 선보이는 그의 면 작업들은 마치 가라앉는 빗줄기처럼 바닥을 향해 이어져 내려온다. 먼발치에서 감상했을 때 개개의 작품은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느껴지지만, 위아래로 그것의 측면까지 자세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금속에 실을 가없이 덧대어 선을 이룰 때까지 감고, 이 선을 쌓기를 다시 수십 번 반복하여 완성된 집적의 소산임을 금세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침묵하는 재료의 언어에 애정을 몰두하여 귀를 기울이고, 반복적으로 쌓은 재료 사이사이에 그의 마음을 덧붙여 밀도 높은 완성도를 구현해낸다. 그렇다면 면작업을 구성하는 모든 가닥들은 작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집약한 시간에 다름 아니며, 그러한 맥락에서 신혜림의 반복성은 곧 시간성과 직결된다.
한편 산업적 생산방식과 달리 공예가의 장인정신은 물질적 실재라는 거대한 조화를 이해하여 재료가 본연의 자연성을 유지하게 하는 노고이다.[2] 따라서 공예는 자연의 윤곽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중에 조형을 향한 도전 정신을 고취하게 만든다. 신혜림의 면 작업에서도 보이지 않는 시간의 뉘앙스가 특정한 조형 언어를 반복함으로써 암시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흘러내리는 듯한 선의 형식이다. 신혜림의 선형은 칼과 가위로 재료를 탐구하고 물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으로, 작가는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선의 외형 안에 작업과 관련된 여러 문맥을 묻어둔다. 이를테면 선은 동세의 일환에서 자연의 에너지를 내포하며, 비율이나 형태, 색상에 있어서는 절제된 와중에도 물성 하나하나의 목소리들을 섬세하게 담을 수 있다. 작가는 또한 사람들 사이에 끈처럼 이어진 관계와 삶의 표상을 선형에 반영하기도 하고, 작업을 연출할 때에도 공간의 선에 개입하여 작업의 조형성을 부각시킨다. 신혜림은 이렇듯 시간을 인내한 재료의 자취를 반복되는 손의 노고와 선형에 힘입어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작가의 노력이 ‘쓰임’에 관한 공예품의 가치를 확장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그가 전시장의 1층 공간에서 제시하는 ‘몸을 위한 사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몸을 위한 사물
‘몸을 위한 사물’의 주를 이루는 것은 신혜림의 장신구 작업들이다. 작가가 아트 주얼리의 분야에서 작업의 깊이를 오랜 기간 헤아려왔음을 참작할 때, 장신구는 신혜림의 공예가 지닌 특유의 감수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장신구에 대한 신혜림의 관심사는 작업이 일상의 남루를 덜어내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말인즉 그는 재료의 물성에 명민한 손의 감각을 더하여, 공예품이 갖는 기능성과 예술적인 의미를 확장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공예품은 실용적인 기능을 고집스럽게 대물림하며, 목적과 기능의 맥락으로 인해 신체와 긴밀하게 결부된다. 하물며 장신구는 사람의 몸을 의지 대상으로 삼아 신체의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몸에 의존하고 몸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사물이다. 신혜림의 장신구도 분명히 이러한 특성에 기초하고 있으나, 그의 작업은 그것이 진열되는 의지처와 물성의 측면에서 어딘가 낯선 감각을 일깨운다. 신혜림이 출품한 장신구들은 말하자면 ‘그림으로 만든 브로치’이기 때문이다.
본 작업은 작가가 비(rain)를 주제로 직접 그린 그림의 캔버스 천을 돌돌 감고 압축한 후에, 그것을 금속의 틀 안으로 모아 평평한 형태로 가공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의 브로치는 몸에 착용하는 그림이요, 입체가 된 평면이다. 그것은 또한 장신구의 본질에 맞게 신체 지향적으로 몸을 보완하지만, 신혜림은 이러한 장식의 기능이 공간의 벽을 채우는 쓸모로 연장될 수 있도록, 장신구가 지닌 기능의 의미를 새롭게 측정하고 있다. 요컨대 그의 브로치는 가슴 부위에서 떼어져 나와 벽이라는 다른 맥락에 부착되어도, ‘관람’의 대상이라는 또 다른 기능을 부여받음으로써 공예의 전통 안에서 쓰임의 가치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장신구의 본래 기능은 은유적으로 머물게 되지만, 그럼에도 장식의 쓸모가 개념적으로나마 여전히 존속된다는 사실은 사물이 자아내는 울림을 더욱 긴장감 있게 증폭시킨다.
더욱이 신혜림의 장신구는 캔버스를 소재로 삼아 그림을 재가공했다는 점에서, 재료와 물성의 측면에서도 ‘다시 쓰임’이라는 공예의 폭을 넓히고 있다. 공예는 사물성에 근거하므로, 재료의 물질적 속성을 살펴 그것의 잠재성을 가늠하는 것은 물론 공예가의 마땅한 소임일 터이다. 그러나 신혜림의 공예는 행동반경 내에 있는 사소한 대상들을 애정으로 살피고, 손바닥에 투박스럽게 맞닿은 재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물성의 근원에 다가간다는 점에서, 사물을 한층 유연한 가능성과 변이의 영역으로 격상시킨다. 그 자체로 이미 나름의 시간성을 압축하고 있는 캔버스가 작가의 손에서 물질화를 거쳐 또 다른 시간의 결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작가는 ‘몸을 위한 사물’을 통해 공예의 쓰임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생활의 작은 일부로부터 더 큰 공간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신혜림은 공간 내에서 공예품이 갖는 소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노력은 2층의 ‘구석을 위한 사물’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 구석을 위한 사물
전시 공간 2층의 ‘구석을 위한 사물’에서 신혜림은 공예품을 매개로 공간 내의 여러 경계를 더듬으며, 공간을 맴도는 나직하고도 독특한 울림이 그의 작업을 통해 나부끼기를 추구한다. 오밀조밀하게 엮어 만든 작업을 실내의 빈 여백에 대담하게 얹음으로써, 죽은 듯이 무료하고 공허했던 공간이 공예품으로 인해 별안간 의미를 부여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미건조한 모퉁이에 창조의 쾌감을 불어넣는 작가의 매개체는 어떤 거시적인 사물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금속 특히 은으로 제작된 작은 오브제와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선형의 작업들이 주축이 된다. 하지만 신혜림의 오브제들이 빚어내는 경험적인 지평은 그것의 외양처럼 결코 사소하거나 잔잔하지만은 않다. 구석의 경계에 무심하게 놓인 이 작업들은 때로는 증폭하는 형상이 되어 사물의 내적인 목소리를 내부에 온전히 채우거나, 면과 면 사이에 간결한 선이 파고들게 만들어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세우기 때문이다.
신혜림은 이상에서 살펴본 ‘몸과 구석을 위한 사물’에서 공예품의 기능이 몸에서 벽으로, 또는 탁자에서 벗어나 지면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경계를 초월함으로써, 공예가 위치한 일련의 좌표를 아우르면서도 또 하나의 좌표를 그려나간다. 더욱이 상기의 과정은 그가 사물의 기능을 곧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작가의 생각과 표현을 운반하는 중심이 바로 기능임을 깨닫게 만든다. 기능은 기실 공예의 바탕이기에, 공예가는 재료와 기술을 토대로 기능성을 오랜 시간 고찰한 끝에야 비로소 사고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한 시간과 숙련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작가로서의 목소리를 완성한다는 사실은 이따금씩 작가의 언어가 그의 손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혜림은 재료를 묵묵히 쥐고 공예품의 쓰임의 폭을 넓히는 과정에서 점차 시간의 테이프를 앞으로 돌리더니, 이윽고 작업에 임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눈앞에 조금씩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만 속하는 영역으로 돌아오는 이 회귀를 서서히 거듭한 끝에, 마침내는 책임과 과제와 요구로부터 해방되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존재물을 곱새겨보게 되었다. 작가가 전시 공간의 결미에서 펼쳐 보이는 작업들은 이와 같이 그가 시간을 거슬러 내면의 세계로 거듭 돌아오게 되는 일종의 고유한 ‘내적 전기(biography)’와도 같다. 더불어 2009년에 개최된 그의 개인전 《마음의 지도(Mind map)》의 제목과 같이, 이는 본 전시의 모든 결과물들이 어떠한 흐름 안에서 하나의 끈으로 순환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이기도 하다.
# 내적 전기를 향한 길
본 전시의 대단원은 작가가 그의 모든 감각과 삶의 화살표를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노정이자, 값지고 순수한 것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여 새로운 기점을 모색하는 장(場)이다. 그런데 자의식의 조각들이 그에게 다시 스며든 것은 거창한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어쩌면 필연이 작가를 그렇게 몰았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신혜림에 의하면 그의 면작업과 오브제 등은 작업의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를 예측하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맞닥뜨린 시간을 걸으며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의무에 따라 만들어진 작업이었다. 환언하자면 작가는 마치 반석처럼 그의 삶의 중심이 되는 기반이나 잊을 수 없는 것, 어떤 원천을 향해 그를 돌아가게 만드는 무언가를 종종 부득이하게 뒤로 미루어 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작은 파동까지 담을 수 있는 작업을 절실히 갈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혜림은 삶의 단상을 꾸밈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작업을 위해 기억의 단편들을 소급해 올라가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 작업들을 재발견하고, 이를 전시 공간 3층에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이렇게 신혜림은 그가 2000년대 초에 시도했던 출발점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를 현재의 감각으로,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이어가고자 한다. 전시장을 채우는 몸, 벽, 구석을 위한 작업들은 기능과 쓰임새의 측면에서 장신구나 평면, 오브제에 속하지만, 작가는 기능적인 조건을 넘어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응시한 성찰의 이야기를 작업에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인간의 문턱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생을 소재로 삼아 우리들 사이의 다원적인 관계성을 표현하는 내러티브의 집합체인 셈이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서사의 골격을 세우는 소재가 쌀알과 숟가락, 늘어지고 이어지는 실 등 (사회 통념을 기준으로) 여성의 일상에 깊이 침전해 있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신혜림이 그 자신이 투영된 삶과 관계의 단면을 작업을 통해 함축하였음을 비추어볼 때, 그의 생활을 둘러싼 소소한 사물들은 그러한 자의식의 서사를 조형화하는 일에 가장 적합한 매체가 아닐 수 없겠다.
한편 신혜림의 삶의 기록과도 같은 이상의 작업들은 전시의 주제인 ‘시간의 비’가 가장 처음 발생하게 된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다. ‘시간의 비’는 사실상 작가가 ‘삶으로 빚어온 일체의 노정’을 압축하는 테마이고, 그가 내면의 서사를 담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내러티브 작업을 위해 손끝의 촉각을 도구로 삼아 분과 초의 시간을 작업에 누적했던 데에서 발단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고 증발하는 일이 반복되어 물방울이 순환하듯, 그의 삶과 작업도 그렇게 실타래처럼 이어져 온 것이다. 따라서 신혜림의 작업은 그의 삶과 내면의 체취를 발산하면서도, 시간의 흐름과 생의 순환, 갈등과 소멸에 이르는 다각적인 관계를 고민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사유의 뜰을 관객과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 스며드는 시간의 비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삶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시간의 빗방울에 삶의 단편들을 싣고, 그것이 물의 흐름이 되도록 흘려보내는 것은 세상사의 필연이자 무언의 약속인 까닭이다. 짐작건대 이는 공예의 덕목과도 다르지 않다. 공예의 덕목이라는 것은 쓰임을 매개로 삶의 정신을 제고하는 데에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신혜림의 작업은 고유의 내적 전기에 이르는 길에 관객을 합류시키고 공예품을 통해 생의 형식을 헤아린다는 점에서, 궁극적 차원에서는 과연 공예의 미덕을 겸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하워드 리사티, 『공예란 무엇인가』, 허보윤 역 (미진사, 2011), 118, 121.
- 위의 글, p.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