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 풍경놀이

보킴, 정재나

Bo Kim / Jaenah Jung

 


2023 / 03 / 23 - 2023 / 04 / 29

숨결: 풍경놀이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서양의 궁원을 보면 기하각적인 패턴과 규모가 전면으로 돌출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베르사유의 화단과 분수는 장대한 규모로 정리된 인공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이며, 이밖에도 빈의 쇤부른, 포츠담의 상수시 등이 인위적으로 디자인된 넓은 터전을 자랑한다. 평지에 세워진 압도적인 크기로는 물론 중국의 정원도 빼놓을 수 없다. 장대한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는 이러한 권위의 상징물로서의 건축물에서, 조경 (造景)의 발생과 존재를 가르는 개념은 ‘충만의 미 (美)’이다. 산수의 배경이 없는 자연 여건에서는 이러한 충만의 미가 필연적인 소산으로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의 조경 정신에서는 이처럼 집집의 정원마다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가꿈을 찾아보기 힘들다. 산골짜기와 산등을 배경에 두고 바위틈의 물에, 그 속에 가라앉은 아름다움에 온 정신을 적셔온 우리는 자연의 물씬한 풍경을 모두 간직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구태여 인공의 경관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다.1)

 

이렇듯 자연을 외경하고 자연 안에서 자그마하나마 공간을 확보해왔던 우리는 또한 풍경을 사색하다가도 그것의 흐름을 집의 한 귀퉁이에서 살짝 건드려 즐길 수 있는 고도의 조형 전략을 활용해왔다. 예컨대 창을 조작하여 외부의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고 차용하는 ‘차경 (借景)’이나 변화무쌍한 집의 구조, 건물의 골격은 자연의 다층적인 구도를 최대한 포용하면서 즐기게 하는 ‘풍경놀이’의 극치를 보여준다.2) 이와 같은 현상에 착안한 본 전시는 조형 언어와 내용을 토대로 주변의 경치를 보듬고 포용하는 두 작가의 작업을 마치 한옥의 프레임처럼 다층적인 공간의 구조 안에서 바라봄으로써,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의 진수를 체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를테면 층마다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전시장의 골격과 계단, 창과 문 등이 작품의 요소들과 협동하며 오감을 자극하는 풍경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국적인 미’를 탐색하고자 하는 라흰갤러리의 이번 ‘숨결 (스미는 숨, 맞닿은 결)’ 전시에서 특별히 ‘풍경놀이’의 정신에 주목하는 까닭은, ‘경치를 빌린다’는 이러한 관념에 힘입어 작품을 인공의 산물이 아닌 무한한 다양성과 자연 요소를 포함한 ‘실체’로서 접근하기 위함이다.

 

한편 권태를 모르는 풍경의 풍취로 초대하는 참여 작가들의 작업과, 감상자가 손을 뻗으면 작업 내의 이러한 풍경 요소에 금방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동질감'을 드리우는 공간 내의 여러 프레임은 모두 ‘관조’와 '어울림'의 정신을 생명으로 삼는다. 가령 보킴과 정재나는 주변의 질서 있는 순환을 자명한 일로 바라보며, 풍경을 나의 기호에 맞춰 분별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그것의 리듬에 작업을 편입시킨다. 아울러 공간의 골격은 바깥의 실제 풍경뿐만 아니라 이를 담은 작품의 내용과 한통속으로 어울리며 총체적인 경관을 자연스럽게 완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연 현상에 드러나는 경이로운 섭리와 변화의 힘에 정신을 적시고, 우열이나 호불호의 판단 없이 온 감각을 곤두세워 그것을 존중하는 지혜는 주체와 대상을 동등하게 세우려는 한국적 정신이 조형적으로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3) 본 전시는 풍경에 순응하고 자연과 모나지 않게 하나 되는 이 풍경 작용에 관객을 스며들게 함으로써 정경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감각적으로 선사하고자 하며, 종국에는 이것이 일상의 비약으로 되살아오도록 부단히 마음을 흔든다.

 

# 잔류의 시간들 – 보킴

 

보킴의 작업은 대기를 물들이면서도 언제든 광채를 상실할 수 있는 바깥의 세계를 관조하며 어렴풋한 의식에 젖어든다. 햇빛이 구름을 태우며 스러지다가도 어느덧 여명이 되어 솟아나기까지의 이 정적만이 흐르는 시간을 응시하고 공기를 거듭 감지하며, 정경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작품에 물들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모든 현상의 장막 뒤에는 생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섭리를 구도하듯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크게 두 갈래의 방향으로 발전한다. 가령 2016년도의 ‘Impermanence’ 작업으로 시작한 일련의 연작들은 물거품처럼 늘 변하는 제행무상 (諸行無常)의 비 (非) 영속성만이 바로 만물의 본성임을 꿰뚫어 본다. 더불어 보킴은 또 다른 시리즈인 ‘아로새기다 (When light is put away)’ 작업을 통해 이와 같은 우주의 이치 앞에서 그의 마음으로 스며드는 감정과 서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작업들은 생명이 내어주거나 가로채는 창밖의 풍경 혹은 하루의 궤적에 따른 변화들을 작가의 감정의 그물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후자에 가깝다.

 

예컨대 본 전시에 출품된 보킴의 <창밖에 어둠이 내리면>과 <너무 긴 어느 겨울날에>는 각각 이슥한 밤에 별이 하나씩 지워지며 빛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고요를 포착하거나, 작업실 바깥의 경치가 실내를 물들이던 때의 향수를 담고 있다. 때로는 체험한 것을 펜으로 포착해낸 일기의 구절이나, 생동하는 박자로 작가와 함께 긴 밤을 지새우던 선율이 일종의 영감이 되어 작업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또한 전시장 1층의 창가에 설치된 미디어 작품 <차경>은 감상자가 소유하기를 바라는 이상적인 경관을 라이트 패널에 표현하면서도, 블라인드를 통해 이를 교묘하게 차단하고 착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이상과 실제 사이의 극단을 부유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담고자 하는 정경이 마치 한옥에 오랜 시간 머물며 창호지를 통과해 들여다보는 것인 양, 가변성과 잠재성이 실현되는 풍경이 되어 관객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이 둔한 탓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변화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지만, 긴 시간 이를 관조하게 되면 꽃과 나뭇잎, 별의 색과 모양이 변하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보킴은 바로 이처럼 그 자신이 생성과 상실을 들여다보았던 혼자만의 ‘잔류의 시간’을 작품에 담아 감상자의 관능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한편 위와 같은 점에서 작가의 출품작들은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비영속성’의 주제와도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연기 (緣起)적으로 오고 가는 풍경 작용에 자신을 편입하고자 했던 작가의 심리는 한지와 모래가 주축을 이루는 재료로부터 부각되고 있다. 한옥의 창에서 착상을 얻었다는 그는 얇은 순지를 이용해 프레임 너머의 풍경과 빛, 그것의 기억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정을 회화로 구현해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지를 겹겹이 오려 붙이고 물감을 얹기를 반복한 후에, 경계선 위로 발린 가루풀을 따라 모래를 뿌린다는 점이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오려 붙인 한지에 주름이나 얼룩이 생기는 것과 함께, 모래 역시 순리를 따르듯이 뜯겨나가게 된다. 요컨대 보킴이 사용하는 이 천연에 가까운 재료들은 작가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관상 (觀想)의 감정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매체 또한 변화를 수반하는 잔류의 시간에 온전히 내맡겨짐으로써 작가가 풍경의 근저로부터 체득한 다층적 사유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의 사유와 수행이란 자연 현상이 만드는 변화와 생성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이 무상함과 분리되지 않는 통일체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좁은 길의 암시다. 그러나 아침의 입김이 어스름이 되어 기우는 풍경의 흐름 앞에서는 인식의 의지를 굴복시켜야만 비로소 그것의 해방된 힘이 솟아나는 법이다. 보킴의 작업은 개체를 분별하거나 불변의 독자성으로 풍경을 밀어 넣지 않는 이러한 지혜를 발휘하며, 자연 현상의 끊임없는 차이와 생성에 깨어 있기를 자신과 관객에게 촉구하고 있다.


# 고풍 (古風)의 원환적 시도 - 정재나

 

목공예에 바탕을 둔 정재나 작가는 과거의 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를 재해석하거나, 혹은 이국적인 디자인으로부터 한국의 정신을 측량하여 작품으로서 둘 사이의 교량을 놓는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이러한 ‘차용’ 개념을 토대로 제작한 가구 작업들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기존의 대상이 지닌 흔적과 출처, 그것에 덧씌워진 갖가지 상념들이 얼마간 그의 작업에 보존됨으로써 작가가 지향하는 차용의 내용을 지탱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감상자와의 원활한 소통에 이르기 위해, 범례를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세월에 잠식되어가는 전통을 일정한 한계 내에서 가까이 느끼게 만들고 있다. 미술품 수출입 상자를 활용한 연작들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업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여기저기 긁히고 해체된 미술품 상자의 이력에 작가가 한국적인 고풍의 혼과 장소적 특징을 불어넣음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면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온 상자가 우리 전통에 잠재되어 있던 형식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돌연 일상의 가운데에 들어서면서 관객과 연결되는 것이다.

 

한편 정재나가 사용하는 수출입 상자는 주로 침엽수로 제작되는데, 이러한 계통의 재목은 강도가 무른 탓에 병충해와 온도, 습도에 민감하다. 따라서 작가는 이를 예방할 방안을 모색하는 동시에, 작업의 외관에서 한국적인 정신이 어떻게 자태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성과 장소성의 맥락을 시간을 거슬러 순환케 하려는, 이 원환적 (圓環的) 상상력은 곧 전통 단청의 수려함으로 생각이 도달하기에 이른다. 단청은 목재 표면이 손상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도 진기한 빛깔과 무늬로 우리 민족성과 감각을 자극하는 까닭이다.4) 그런데 목재를 완전히 덮는 전통 단청과는 달리, 정재나의 작업은 단청의 넘실대는 에너지가 나뭇결의 틈새 사이로 차츰 퇴색되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는 가구의 본래 형태를 보존하면서 여기에 단청의 맥을 녹여내어, 일차적으로는 양자의 예술적 표현과 출처를 모두 작업에 간직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목재는 수종에 따라 흡수율이 상이하므로, 이를 고려하여 물감을 덧칠하고 농담을 조절하는 데에는 대단히 오랜 시간과 노고가 소요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정재나의 작품은 가구용으로 마감되며, 단청의 표현을 극적으로 응축하기 위해 곧게 뻗거나 휘어진 형태가 과감하게 응용되고 있다. 이 모든 작업 과정은 그의 작품을 ‘재탄생’의 산물로 간주하게끔 하는데,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작가가 특별히 왕생 (往生)을 향한 염원이 담긴 ‘연화 단청’을 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불어 단청을 차용한 작가의 작업은 고궁이나 사찰의 외벽을 타고 흐르던 단청을 가구에 접목했다는 점에서, 본 전시가 탐색하는 풍경 작용을 실내의 지척에서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붉고 푸른 단청의 흔적이 공간 안에 드리워짐으로써, 들창으로 스며들던 여광과 대기의 숨결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듯 바깥 풍경의 광휘를 남기며 실내에 어리는 것이다. 이처럼 작업을 매개로 바깥의 풍경이 내부에 거하고 관객이 자연계와 융화되는 모습은 나뭇결을 재해석한 정재나의 또 다른 출품작에서도 실현된다. 이 일련의 평면 작업들은 탁본 기법을 적용하여 나뭇결을 흡사 울창한 풍경처럼 드러낸다. 하지만 작가에 따르면 정경의 한 컷처럼 보이는 이 무늬들은 사실 계절을 거치며 나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장과 기억, 살아온 운명이 작은 파동까지 간직된 기록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단청 작업과 마찬가지로) 공간과 작업, 혹은 특정 대상의 깊은 속내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내부가 실외의 눈부신 경관으로 절로 배어들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정재나의 작업은 그래서 풍경의 ‘원초적인 스밈’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을 마주한 우리의 다소 일천한 경험과 기억의 공백마저 변화시키며, 관객과 풍경 사이에 늘여진 휘장을 한 꺼풀씩 부단히 젖히는 중이다.



 

 


  1. 신영훈, 『한옥의 미학』 (한길사, 1987), 11-16..
  2. 임석재,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 (한길사, 2009), 70-71.
  3. 위의 책, 25-28.
  4. 한석성, 『우리 단청』 (현암사, 2004), 123-124,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