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cm, 83kg, XS
이영욱 개인전 Yi Young Uk
2021 / 4 / 15 - 2021 / 5 / 29
속박과 자유, 두 극한의 미궁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 거짓의 긍정
「어느 날 나는 마트에 들렀다가 한쪽 구석 자리에서 땅콩을 발견했다. … 나는 어두운 통 안에 담겨있던 그들을 신문지 위에 쏟았다. 그리고 하나씩 그들을 덮고 있는 옷가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 땅콩과 나는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이 관계를 그대로 마무리 짓기 싫었다.」
- 이영욱 작업노트 中
얼핏 동화의 서사가 펼쳐지는 듯한 이 글귀들은, 작가 이영욱의 작업 세계로 부드럽게 미끄러질 수 있는 비약을 마련한다. 거창하게 논하자면 작가만의 독특한 철학으로 포장된 일상적인 경험이겠으나, 이는 사실 ‘거짓과 상상력이 깃든 이야기’이다. 먼 옛날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가 『우신예찬』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칭송하게 만들고, 자신이 처한 고달픈 현실에 대해서는 저항하게끔 한다. 이영욱 작가가 거짓의 힘을 보태어 현실을 유희적으로 전복시키고자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이 청년 작가는 과거의 자신을 수동적인 존재로 정의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능동적인 주체로서 자유의 드라마에 참가하게 되는 가장 쉬운 수단으로 일기를 꼽는다. 거짓이 첨가된 일기를 쓰고, 거짓이 거짓을 낳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당초 본인이 원했던 방향대로 사건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기실 모든 예술의 토대는 거짓말에 동의하는 것으로부터 마련되었다. 우리는 거짓말의 꿈같은 이야기에 기만당하면서도,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속임수가 주는 이 달콤한 독약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영욱 작가의 심리 밑에 도사린 갈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 탈주의 공간
오래지 않은 활동 시기를 거치면서도, 이영욱 작가의 작업 방향은 굵직한 흐름을 보이며 변하였다. 유화를 활용한 초기의 리얼리즘 작업, 연관성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을 거쳐, 이제 그는 패턴을 이루며 장사진을 치고 있는 형상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복닥복닥 도열해 있는 이 군상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큰 패턴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동글동글한 캐릭터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할 때, 감상자는 치정 혹은 애욕이 교차하는 적나라한 광경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가 이처럼 섹슈얼한 이미지로 패턴을 구성한 까닭은 본디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성 (性)에 관한 우리 사회의 위선과 이중 잣대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원색과 파스텔톤의 색상이 오가는 이 촌스러운 색채는 또 얼마나 발칙한 상상을 자극하는가. 그러나 이영욱 작가가 라흰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의 표면에 깔린 정염일랑 멀리 제쳐두고, 그것의 본질을 만져보자. 말하자면 끊임없이 패턴을 쌓아가는 작가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보는 것이다.
작가와 그가 그려내는 오브제 사이의 관계는, 작가노트에 등장하는 그와 그의 손에 껍질이 벗겨지는 땅콩 간의 그것과 같다. 오브제들은 오로지 작가의 ‘선택’에 따라 정렬된다. 철저한 갑을 관계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그것으로 빚어진 일에 책임을 져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선택의 방향과 결과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짜릿한 해방감에 빠져든다고 고백한다. 열기 가득한 패턴들의 용광로 속에서, 그는 내면의 족쇄를 풀고 자기만족을 다질 탈주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 육 척 거구에 맞는 옷을 찾아.
망실된 자기를 탐구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차분히 가라앉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패턴을 채우는 행위는 전술한 바와 같이 대단히 적합하다. 주변의 영향에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나, 돈과 순수한 작업 사이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181cm, 83kg의 장건한 체구만큼이나 큰 갈망을 품은 작가에게 너무나 비좁은 현실이다. 이처럼 지금 그가 입고 있는, 가령 엑스스몰 (XS) 사이즈와 같은 작은 옷을 벗고, 꼭 맞는 새 옷을 찾기 위해서는 이 옷 저 옷을 시도해보고 또 갈아입어야 할 것이다.
화폭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공간이란 그릇과도 같아서, 작가의 사유가 담기고 옮겨지며 전달되기 마련인 까닭이다. 다만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어야 그릇이 제 역할을 하듯, 자신에게 맞는 작업을 찾고자 하는 작가 이영욱에게도 이 과정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터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의 젊고 세찬 기세가 이끄는 방향대로 패턴들을 일렬종대로 쌓아가면서도, 동시에 서서히 내뱉듯 비워내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속박과 자유, 두 극한이 강하게 부딪치며 이상한 조화를 이루는 이 형상들을 짚어가며, 작가의 행위를 손끝으로 따라 가보라. 스케치에만 며칠을 할애하고, 그리드를 수없이 다시 짜며, 크기를 달리하여 치밀하게 배치하는 이 행위.
그런데 작가 본인조차 그에게 꼭 맞는 옷 한 조각을 아직 명확히 잡지 못한 상황임에도, 이영욱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모든 과정은 마냥 편안하고 즐겁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호모 루덴스의 열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위징아 (Johan Huizinga)가 주창한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놀이’에 헌신해왔다. 그리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르는 호모 루덴스가 스스로와 경쟁을 벌일 때, 예술은 비로소 꽃을 피운다. 그러므로 이영욱 작가는 이제 작업을 유희로, 유희를 경쟁력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라흰갤러리에서 개최되는 이번 개인전은 무한한 창조성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작가에게 일종의 도약의 발판인 셈이라 하겠다. 라흰의 공간을 동심원으로 하여 전개되는 작가만의 이야기에, 그리고 날개를 달아주듯 꼭 맞는 옷을 찾고자 하는 그의 즐거운 놀이에, 강하게 시야를 사로잡히듯 이끌려보기를 바란다.
< 뜬금없이 우연히 찾아온 >
이영욱
어느 날 나는 집 앞에 있는 마트에 들렀다가 한쪽 구석 자리에서 땅콩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땅콩을 먹고 싶었던 나머지 땅콩을 구매하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장을 본 물건들을 다 풀어헤치고 땅콩이 담겨있는 통을 열어보았다. 당연히 땅콩 껍질이 벗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뒤집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실망감이 덮쳐왔다.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의 땅콩들이 옹기종기 통 안에 처박혀 있던 것이었다. 실망하는 내 표정을 발견한 땅콩들 역시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제품 뒷면에 적혀있는 부분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상세하게 표기된 것은 없었다. 다시 구멍을 통해 그들을 보았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삶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고, 자기 자신을 내보내기 위해 가공했던 회사에 대한 원망과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구매자의 실망감이 자기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겠지만, 실망한 표정으로 플라스틱 통 안을 바라보고 있는 한 인간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억울할 뿐이었다. 나는 이들의 서러움을 달래주고파 한 알을 집어 껍질째 입에 넣어보았다. 그러자 통에 담긴 그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통 밖의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찡그린 표정을 짓고 땅콩을 씹고 있는 한 멍청이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어두운 통 안에 담겨있던 그들을 신문지 위에 쏟았다. 그리고 하나씩 그들을 덮고 있는 옷가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벗기기 시작하면서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
그런데 나는 땅콩 껍질을 벗기면서 사소한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나와 맞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일어났던 일에 대한 부끄러움과 걱정과 불안함이 엄습하기도 했으며 현실에 대한 고민이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땅콩 껍질을 벗기는 일을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땅콩과 나는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 친해지기 시작했으며 이 관계를 그대로 마무리 짓기 싫었다.
30분이 지났을까. 나는 점점 벗겨진 땅콩들의 마음을 확인하며 말없이 한 알씩 벗겨갔고, 그러자 나를 압박하던 고민과 걱정들이 나와 거리를 두고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껍질을 벗기고 나서야 알아차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일들을 반복적으로 행했던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해는 이미 떨어져 있었고 땅콩들은 뽀얀 속살을 들어내며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자기들도 그 옷들이 불편했는지는 몰라도, 드디어 나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에 가득 차 보였다.
다시 나를 압박하던 일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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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캐릭터 시리즈’에서는 해방을 향한 인간의 소심한 외침과 사회적 권위 의식으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 바 있다. 캐릭터들이 취하는 행위와 패턴을 통해서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초점을 두고, 육체적 본능과 내면 안에서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감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2021년 작업에서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중적 잣대를 어떻게 하면 짓누르고, 속박되어 있던 족쇄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 방법은 무의미한 육체적 몸짓을 반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만 이러한 몸짓은 내가 마주하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밀어내기 위한 행위이지,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번 작업들은 몸짓을 통해 캔버스 위에 하나의 형상과 의미를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흔적을 남기는 것에 가깝다. 타인에게 이 흔적인 비상식적인 언어로 전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와의 소통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심연 속으로 향하던 물결, 즉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하겠다.
이 적멸은 무의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는 공간이다.